‘50억’ 유혹 물리치고 겸재 되찾아 온 신부님… “007 작전 저리 가라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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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수연
작성일23-02-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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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속 마흔다섯 살 선지훈 신부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머리 위 선반에 가방을 조심스럽게 올려 놓은 그는 비행 11시간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수시로 선반을 올려다보는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조금만 참으면 서울이다···’. 이윽고 29일 오전 11시 30분.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닿았다. 신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선 후기 대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 화첩이 80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정말 초조했어요. 안전하게 포장해서 가방에 넣은 화첩이 행여나 잘못되면 어쩌나, 잠깐 잠든 사이에 누군가 가방을 가져가면 어쩌나··· 불안해서 계속 가방을 지켰지요.”
007 작전 같은 막중한 유물 운송 과정을 회상하면서 선지훈(63)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이 허허, 웃었다.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겸재 정선 화첩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주역이다. 금강산의 절경을 그려낸 ‘금강내산전도’ 등 겸재 그림 21점으로 구성된 화첩은 진경산수화, 일반 산수화, 고사 인물화 등 겸재의 다양한 화풍을 볼 수 있는 걸작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신부가 192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해 독일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쾰른대에서 미술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처음 발견해 화첩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6·25전쟁 이후 뿔뿔이 흩어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1909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서울 혜화동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오틸리엔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은 형제 같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 신부는 1991년 독일 뮌헨대로 유학을 떠나면서 “기회가 되면 겸재 화첩을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막역한 친구였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의 총아빠스(원장)가 되자 그는 조심스럽게 화첩 반환을 요청했고, 수년간 끈질긴 요청과 설득 끝에 오틸리엔 수도원의 큰 결단을 이끌어냈다. 그 사이 미국 덴버미술관의 미술학자 케이 블랙이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고 극찬하는 논문을 발표해 화첩은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가 ‘50억원’을 호가하며 경매를 권유했지만, 12명으로 이뤄진 수도원 장로회는 만장일치로 ‘한국 반환’을 결정했다.
왜관 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겸재 화첩은 지금까지도 문화재 반환의 모범 사례로 회자된다. 선 신부는 화첩뿐 아니라 독일인 신부가 1913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 420점, 오틸리엔 수도원 서가에 방치돼있던 1930년대 기록물 ‘가톨릭 소년’ 전 36권을 돌려받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 연말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선 신부를 서울 장충동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에서 만났다.
◇50억원 유혹도 뿌리친 ‘착한 반환’
-수훈을 축하드립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수도자로서 이런 걸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난해 제가 가톨릭 사제가 된 지 25년이라 주변에서 많은 분이 추천해주신 것 같아요. 제 개인 것이 아니라 제가 속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겸재 화첩은 수도원 어디에 있었습니까.
“근 50년 동안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의 커다란 진열장 안에 온갖 한국 민속품과 함께 전시돼 있었어요. 어느 누구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1973년 유준영이라는 유학생이 쾰른대 도서관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란 책을 읽다가 겸재 그림 3점이 실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였지요. 유준영은 1975년 오틸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해서 화첩을 눈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국내 학계에 알렸습니다.”
-그 뒤로 화첩은 어떻게 됐죠?
“유 교수가 발견한 이후로 더 이상 전시되지 않고 수도원장의 금고로 옮겨졌어요. 수도원도 뒤늦게 가치를 깨닫고 보안을 강화한 거죠. 유학 시절, 수도원장을 조르고 졸라서 화첩을 딱 한 번 봤습니다. 금고에서 꺼내 보자기를 조심조심 풀고 비단 화첩의 첫 장을 넘기는데 ‘금강내산전도’가 떡 펼쳐져요. 히야~, 솟구쳐 오르는 비로봉에 울창한 삼림, 드문드문 박힌 암자까지, 항공사진 찍은 것처럼 입체적인 그림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찬찬히 21점을 다 넘겨본 후에, 이건 반드시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고 마음 깊이 품었죠.”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네요.
“유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에게 종종 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는데, 그가 수도원 원장이 된 겁니다. 때가 왔다 싶어서 명분을 만들어 설득했어요. 이 귀한 작품이 철제 금고에만 있으면 되겠느냐, 2009년이면 오틸리엔 연합회의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니까 그걸 계기로 한국에 돌려주면 의미가 각별하지 않겠냐고요. 화첩이 영미 미술계에 알려지고 고미술 수집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뉴욕 크리스티에선 직원을 두 차례나 보내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하지만 슈뢰더 원장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어떻게 돈으로 거래하겠습니까.”
-결국 수도원 장로회에서 12명 만장일치로 반환이 결정됐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은 영혼이 깃들어있는 선교지니까요. 1909년 독일인 수도사 2명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는지 보았고, 수도원이 있던 북한 지역에선 공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제가 뮌헨대에서 교회사를 공부하며 쓴 석사 논문이 초창기 그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들은 자기 선교지에 있는 민족의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연구, 보존하고 기록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화첩은 강대국이 약탈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화에 심취한 베버 신부가 수집한 것을 선한 마음으로 돌려준 것이죠. 제가 설득했지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돌려준 겁니다. 왜관 수도원과 오틸리엔 수도원의 형제애, 한국과 독일, 두 나라 사람들이 쌓아온 신뢰와 존경심, 그리고 예레미아스 슈뢰더라는 젊은 수도원장의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반환식 후에 화첩을 직접 들고 귀국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40대 뜨거운 혈기로 분도출판사를 운영하던 시절이었지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일정을 마치고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마련해준 반환식에 참석했는데 문제는 유물 운송이었어요. 안전하게 옮기려면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화첩의 금전적 가치를 산정하기도 어렵고 그만한 돈을 지출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때마침 우리 문화재 유럽 순회전이 독일에서 열리고 있어서 전시가 끝난 뒤 그 유물들과 함께 귀환시키는 방법도 나왔는데, 용기를 내서 내가 직접 들고 가겠다고 했어요. 혹시나 독일 공항에서 문제가 생길까 봐 ‘이 유물은 훔친 게 아니라 수도원이 돌려준 것’이라는 확인서를 슈뢰더 원장이 써줬고요.”
-떠들썩하게 돌아올 법한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인데, 007 작전처럼 비밀리에 진행됐네요.
“세상에 공개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요. 인천공항에 수사님 한 분이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공항에서 장충동까지 오면서도 탈취당할까 봐 조마조마하더군요. 지나고 보니 재미난 에피소드가 됐습니다.”(웃음)
◇두 번의 火魔에도 살아남은 그림
불후의 명작엔 불멸의 생명력이 있는 걸까. 선 신부는 “이 겸재 화첩은 두 번이나 불길을 피한 생명력 강한 작품”이라고 했다. 한 번은 독일에서, 한 번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일이다. 1980년 화첩은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을 잠시 떠났다. 뮌헨 바이에른주립 고문서연구소에 근무하던 베네딕도회 수녀가 보존 처리를 자청했다. 선 신부는 “수녀는 당시 집과 연구소를 오가며 보존 처리 작업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아파트에 큰불이 나서 사망했다”며 “화첩은 천만다행으로 연구소에 있어서 화를 면했다”고 했다.
-왜관 수도원에 돌아온 후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007년 왜관 수도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어요. 그때 전 서울에 있었고, 후배 인영균 신부가 불길을 뚫고 문서고에 들어가 화첩부터 구했습니다. 불이 옮겨붙기 전에 꺼내서 온전한 상태로요. 이 화첩은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 같습니다. 위기에도 살아남아서 계속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준다는 게, 우리 민족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 아닐까요.”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에도 화첩이 메인 작품으로 전시됐죠.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전시된 화첩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려서 화제가 됐습니다.
“RM 덕분에 관람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방문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죠.”
-화첩 그림 21점 중에 한 점만 꼽는다면요?
“갈수록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가 좋습니다. 눈 덮인 산속에서 선비가 흰 꽃이 피어난 매화나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어요. 하늘에선 멀리 학 한 마리가 날아오죠. 선비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화꽃을 즐기니까 학이 그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내용이에요. 겸재가 진경산수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고사 인물도(옛 이야기 속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한 그림)도 아주 빼어납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화첩 영인본을 제작해서 제게도 한 권을 주셨는데, 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역사 교사가 되고 싶었던 신부님
선 신부 고향은 경북 김천이다. 영친왕 보모상궁 출신인 최송설당이 일제강점기에 전 재산을 털어 설립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역사를 중시하는 학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경주 남산에 가면 기왓장, 도자기 파편 같은 중요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중학교 땐 그걸 주워서 방학 숙제로 냈어요. 사찰 답사 가기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신부님이 절을 좋아하셨네요.(웃음)
“이모가 수녀님이고 독실한 가톨릭 집안인데도 사찰 가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김천 직지사, 청암사 등 주위에 좋은 사찰이 많았죠. 절에 있는 부도 하나를 봐도 마음이 떨리는 거예요. 역사 교사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왜관수도원에 입회했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3년 동안 결론을 못 내리다가 결국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왜관수도원에 많이 갔는데 독일인 수도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수도원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수도자이면서 사제거든요. 이중 소명이 있는 거죠. 내가 도전해볼 수 있는 삶이었어요.”
-사제가 된 이후 오히려 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셨지요?
“유럽 대학에선 가톨릭 교회사와 일반 역사학 공부가 큰 차이가 없어요. 가톨릭 교회 역사가 그네들의 삶이고 역사의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이죠. 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게 왜관수도원이라는 한 수도원의 역사가 아니라 넓게 보면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입니다.”
-’문화재 전문 신부’라는 타이틀도 생겼습니다.
“저는 아름다움 탐구, 가치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어요. 역사가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나의 언행이 내일이면 역사가 됩니다. 우리 모두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죠. 개인의 메모나 편지, 일기, 무심코 한 말 한마디도 누군가의 뇌리에 꽂히면 인호(印號)처럼 새겨져 역사적 단초가 됩니다. 겸재 화첩이 독일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에도 소소한 기록과 보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가 1913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 420점도 신부님이 찾아내셨죠?
“제가 분도출판사 사장을 13년 했어요.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면서 마지막 기착지는 늘 오틸리엔 수도원이었죠. 어느 날 테오필 가우스라는 신부가 제게 오더니 100년 전 한국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이 수도원에 있다는 거예요. 보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복도로 나오라고. 다음 날 아침에 그걸 꺼내 왔는데, 마치 한 달 전 채집한 것처럼 생생해요. 한라꽃장포, 참식나무, 큰반쪽고사리···. 에카르트 신부가 북한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조랑말 타고 다니며 채집한 식물을 모았는데 학명, 한국 이름까지 전문적인 기법으로 다 적어놨어요. 우여곡절 끝에 반환 받아서 2015년 국립수목원에 기탁했습니다. 수목원 측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희귀 자생종이 많고, 1950년 이전 식물 표본은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조선왕실의궤 반환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지요.”
-국내 문화재 보존 활동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독일인 건축가 알빈 슈미트가 설계한 칠곡 왜관성당이 5년 추진 끝에 2018년 등록문화재가 됐어요. 왜관 순심여고와 왜관초등학교 사이의 길은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의 우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중섭이 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왜관에 있는 구상 집에 머물며 대구 전시회를 준비했지요. 둘의 우정을 테마로 하는 거리를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 중입니다.”
◇“신문은 살아 있는 기도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 화첩’과 식물 표본 이후에도 세 차례 더 한국 문화재를 반환했다. 2016년엔 17세기 익산 호적을, 2018년엔 국내외에 12점만 남은 18세기 조선 갑옷 면피갑(綿皮甲)을 돌려줬다. 2020년엔 1960년대 제작된 남성용 혼례복 단령(團領)을 기증했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은 한국 최초 양봉 교재인 ‘양봉요지’를 2018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했다. 선 신부의 끈질긴 노력이 ‘선한 반환’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환 사례가 수차례 보도되면서 오틸리엔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졌습니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가 국내에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수 이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습니다. 여러 민간 기관에서 오틸리엔 수도원과 접촉했지만 교류는 전부 일회성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2012년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산과 힘, 지속성이 생겼습니다.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가 약 1700점이에요. 재단에서 이걸 전수조사하고 도록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국격이 보통 높아진 게 아닙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순례지 반열에 올랐습니다.”
-겸재 화첩은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데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돼 소유권은 여전히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하는 게 한 가지 난관입니다. 기회가 될 때 완전한 반환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은 매주 강론 소재를 어디서 찾으시나요?
“사실 강론만 안 하면 신부 할 만하다 할 정도로 소재 찾기가 고역입니다.(웃음) 저한테는 신문이 살아있는 기도서예요.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생기는 상흔, 매일 발생하는 사건 사고 이면에도 초월적 메시지가 숨어있지요. 유년 시절부터 신문 읽기를 좋아해서 광고까지 모든 면을 샅샅이 읽었습니다. 분도출판사 사장 할 때는 5~6개를 구독했고요. 논설위원들의 단문에 매료돼 글쓰기를 배웠지요.”
-새해 새롭게 결심한 게 있습니까.
“올해는 한독 수교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나라 미래 세대의 교류를 위해서 노력하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여름엔 왜관수도원이 운영하는 순심학교의 젊은 선생님들과 함께 오틸리엔 수도원을 포함한 순례를 할 예정입니다.”
-새해가 밝았는데도 우울한 뉴스뿐입니다. 앞이 막막한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눈앞의 매혹적인 우상을 좇지 말고 꾸준히 선한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미래를 변화시킬 힘과 가능성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습니다.”
http://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1/14/WGIPJR4PCZFRDGUPWM5J5YUOFY/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정말 초조했어요. 안전하게 포장해서 가방에 넣은 화첩이 행여나 잘못되면 어쩌나, 잠깐 잠든 사이에 누군가 가방을 가져가면 어쩌나··· 불안해서 계속 가방을 지켰지요.”
007 작전 같은 막중한 유물 운송 과정을 회상하면서 선지훈(63)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이 허허, 웃었다.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겸재 정선 화첩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주역이다. 금강산의 절경을 그려낸 ‘금강내산전도’ 등 겸재 그림 21점으로 구성된 화첩은 진경산수화, 일반 산수화, 고사 인물화 등 겸재의 다양한 화풍을 볼 수 있는 걸작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신부가 192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해 독일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쾰른대에서 미술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처음 발견해 화첩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6·25전쟁 이후 뿔뿔이 흩어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1909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서울 혜화동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오틸리엔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은 형제 같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 신부는 1991년 독일 뮌헨대로 유학을 떠나면서 “기회가 되면 겸재 화첩을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막역한 친구였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의 총아빠스(원장)가 되자 그는 조심스럽게 화첩 반환을 요청했고, 수년간 끈질긴 요청과 설득 끝에 오틸리엔 수도원의 큰 결단을 이끌어냈다. 그 사이 미국 덴버미술관의 미술학자 케이 블랙이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고 극찬하는 논문을 발표해 화첩은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가 ‘50억원’을 호가하며 경매를 권유했지만, 12명으로 이뤄진 수도원 장로회는 만장일치로 ‘한국 반환’을 결정했다.
왜관 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겸재 화첩은 지금까지도 문화재 반환의 모범 사례로 회자된다. 선 신부는 화첩뿐 아니라 독일인 신부가 1913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 420점, 오틸리엔 수도원 서가에 방치돼있던 1930년대 기록물 ‘가톨릭 소년’ 전 36권을 돌려받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 연말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선 신부를 서울 장충동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에서 만났다.
◇50억원 유혹도 뿌리친 ‘착한 반환’
-수훈을 축하드립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수도자로서 이런 걸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난해 제가 가톨릭 사제가 된 지 25년이라 주변에서 많은 분이 추천해주신 것 같아요. 제 개인 것이 아니라 제가 속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겸재 화첩은 수도원 어디에 있었습니까.
“근 50년 동안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의 커다란 진열장 안에 온갖 한국 민속품과 함께 전시돼 있었어요. 어느 누구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1973년 유준영이라는 유학생이 쾰른대 도서관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란 책을 읽다가 겸재 그림 3점이 실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였지요. 유준영은 1975년 오틸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해서 화첩을 눈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국내 학계에 알렸습니다.”
-그 뒤로 화첩은 어떻게 됐죠?
“유 교수가 발견한 이후로 더 이상 전시되지 않고 수도원장의 금고로 옮겨졌어요. 수도원도 뒤늦게 가치를 깨닫고 보안을 강화한 거죠. 유학 시절, 수도원장을 조르고 졸라서 화첩을 딱 한 번 봤습니다. 금고에서 꺼내 보자기를 조심조심 풀고 비단 화첩의 첫 장을 넘기는데 ‘금강내산전도’가 떡 펼쳐져요. 히야~, 솟구쳐 오르는 비로봉에 울창한 삼림, 드문드문 박힌 암자까지, 항공사진 찍은 것처럼 입체적인 그림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찬찬히 21점을 다 넘겨본 후에, 이건 반드시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고 마음 깊이 품었죠.”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네요.
“유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에게 종종 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는데, 그가 수도원 원장이 된 겁니다. 때가 왔다 싶어서 명분을 만들어 설득했어요. 이 귀한 작품이 철제 금고에만 있으면 되겠느냐, 2009년이면 오틸리엔 연합회의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니까 그걸 계기로 한국에 돌려주면 의미가 각별하지 않겠냐고요. 화첩이 영미 미술계에 알려지고 고미술 수집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뉴욕 크리스티에선 직원을 두 차례나 보내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하지만 슈뢰더 원장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어떻게 돈으로 거래하겠습니까.”
-결국 수도원 장로회에서 12명 만장일치로 반환이 결정됐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은 영혼이 깃들어있는 선교지니까요. 1909년 독일인 수도사 2명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는지 보았고, 수도원이 있던 북한 지역에선 공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제가 뮌헨대에서 교회사를 공부하며 쓴 석사 논문이 초창기 그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들은 자기 선교지에 있는 민족의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연구, 보존하고 기록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화첩은 강대국이 약탈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화에 심취한 베버 신부가 수집한 것을 선한 마음으로 돌려준 것이죠. 제가 설득했지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돌려준 겁니다. 왜관 수도원과 오틸리엔 수도원의 형제애, 한국과 독일, 두 나라 사람들이 쌓아온 신뢰와 존경심, 그리고 예레미아스 슈뢰더라는 젊은 수도원장의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반환식 후에 화첩을 직접 들고 귀국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40대 뜨거운 혈기로 분도출판사를 운영하던 시절이었지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일정을 마치고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마련해준 반환식에 참석했는데 문제는 유물 운송이었어요. 안전하게 옮기려면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화첩의 금전적 가치를 산정하기도 어렵고 그만한 돈을 지출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때마침 우리 문화재 유럽 순회전이 독일에서 열리고 있어서 전시가 끝난 뒤 그 유물들과 함께 귀환시키는 방법도 나왔는데, 용기를 내서 내가 직접 들고 가겠다고 했어요. 혹시나 독일 공항에서 문제가 생길까 봐 ‘이 유물은 훔친 게 아니라 수도원이 돌려준 것’이라는 확인서를 슈뢰더 원장이 써줬고요.”
-떠들썩하게 돌아올 법한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인데, 007 작전처럼 비밀리에 진행됐네요.
“세상에 공개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요. 인천공항에 수사님 한 분이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공항에서 장충동까지 오면서도 탈취당할까 봐 조마조마하더군요. 지나고 보니 재미난 에피소드가 됐습니다.”(웃음)
◇두 번의 火魔에도 살아남은 그림
불후의 명작엔 불멸의 생명력이 있는 걸까. 선 신부는 “이 겸재 화첩은 두 번이나 불길을 피한 생명력 강한 작품”이라고 했다. 한 번은 독일에서, 한 번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일이다. 1980년 화첩은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을 잠시 떠났다. 뮌헨 바이에른주립 고문서연구소에 근무하던 베네딕도회 수녀가 보존 처리를 자청했다. 선 신부는 “수녀는 당시 집과 연구소를 오가며 보존 처리 작업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아파트에 큰불이 나서 사망했다”며 “화첩은 천만다행으로 연구소에 있어서 화를 면했다”고 했다.
-왜관 수도원에 돌아온 후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007년 왜관 수도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어요. 그때 전 서울에 있었고, 후배 인영균 신부가 불길을 뚫고 문서고에 들어가 화첩부터 구했습니다. 불이 옮겨붙기 전에 꺼내서 온전한 상태로요. 이 화첩은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 같습니다. 위기에도 살아남아서 계속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준다는 게, 우리 민족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 아닐까요.”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에도 화첩이 메인 작품으로 전시됐죠.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전시된 화첩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려서 화제가 됐습니다.
“RM 덕분에 관람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방문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죠.”
-화첩 그림 21점 중에 한 점만 꼽는다면요?
“갈수록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가 좋습니다. 눈 덮인 산속에서 선비가 흰 꽃이 피어난 매화나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어요. 하늘에선 멀리 학 한 마리가 날아오죠. 선비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화꽃을 즐기니까 학이 그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내용이에요. 겸재가 진경산수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고사 인물도(옛 이야기 속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한 그림)도 아주 빼어납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화첩 영인본을 제작해서 제게도 한 권을 주셨는데, 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역사 교사가 되고 싶었던 신부님
선 신부 고향은 경북 김천이다. 영친왕 보모상궁 출신인 최송설당이 일제강점기에 전 재산을 털어 설립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역사를 중시하는 학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경주 남산에 가면 기왓장, 도자기 파편 같은 중요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중학교 땐 그걸 주워서 방학 숙제로 냈어요. 사찰 답사 가기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신부님이 절을 좋아하셨네요.(웃음)
“이모가 수녀님이고 독실한 가톨릭 집안인데도 사찰 가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김천 직지사, 청암사 등 주위에 좋은 사찰이 많았죠. 절에 있는 부도 하나를 봐도 마음이 떨리는 거예요. 역사 교사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왜관수도원에 입회했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3년 동안 결론을 못 내리다가 결국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왜관수도원에 많이 갔는데 독일인 수도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수도원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수도자이면서 사제거든요. 이중 소명이 있는 거죠. 내가 도전해볼 수 있는 삶이었어요.”
-사제가 된 이후 오히려 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셨지요?
“유럽 대학에선 가톨릭 교회사와 일반 역사학 공부가 큰 차이가 없어요. 가톨릭 교회 역사가 그네들의 삶이고 역사의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이죠. 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게 왜관수도원이라는 한 수도원의 역사가 아니라 넓게 보면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입니다.”
-’문화재 전문 신부’라는 타이틀도 생겼습니다.
“저는 아름다움 탐구, 가치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어요. 역사가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나의 언행이 내일이면 역사가 됩니다. 우리 모두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죠. 개인의 메모나 편지, 일기, 무심코 한 말 한마디도 누군가의 뇌리에 꽂히면 인호(印號)처럼 새겨져 역사적 단초가 됩니다. 겸재 화첩이 독일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에도 소소한 기록과 보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가 1913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 420점도 신부님이 찾아내셨죠?
“제가 분도출판사 사장을 13년 했어요.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면서 마지막 기착지는 늘 오틸리엔 수도원이었죠. 어느 날 테오필 가우스라는 신부가 제게 오더니 100년 전 한국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이 수도원에 있다는 거예요. 보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복도로 나오라고. 다음 날 아침에 그걸 꺼내 왔는데, 마치 한 달 전 채집한 것처럼 생생해요. 한라꽃장포, 참식나무, 큰반쪽고사리···. 에카르트 신부가 북한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조랑말 타고 다니며 채집한 식물을 모았는데 학명, 한국 이름까지 전문적인 기법으로 다 적어놨어요. 우여곡절 끝에 반환 받아서 2015년 국립수목원에 기탁했습니다. 수목원 측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희귀 자생종이 많고, 1950년 이전 식물 표본은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조선왕실의궤 반환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지요.”
-국내 문화재 보존 활동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독일인 건축가 알빈 슈미트가 설계한 칠곡 왜관성당이 5년 추진 끝에 2018년 등록문화재가 됐어요. 왜관 순심여고와 왜관초등학교 사이의 길은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의 우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중섭이 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왜관에 있는 구상 집에 머물며 대구 전시회를 준비했지요. 둘의 우정을 테마로 하는 거리를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 중입니다.”
◇“신문은 살아 있는 기도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 화첩’과 식물 표본 이후에도 세 차례 더 한국 문화재를 반환했다. 2016년엔 17세기 익산 호적을, 2018년엔 국내외에 12점만 남은 18세기 조선 갑옷 면피갑(綿皮甲)을 돌려줬다. 2020년엔 1960년대 제작된 남성용 혼례복 단령(團領)을 기증했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은 한국 최초 양봉 교재인 ‘양봉요지’를 2018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했다. 선 신부의 끈질긴 노력이 ‘선한 반환’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환 사례가 수차례 보도되면서 오틸리엔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졌습니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가 국내에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수 이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습니다. 여러 민간 기관에서 오틸리엔 수도원과 접촉했지만 교류는 전부 일회성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2012년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산과 힘, 지속성이 생겼습니다.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가 약 1700점이에요. 재단에서 이걸 전수조사하고 도록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국격이 보통 높아진 게 아닙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순례지 반열에 올랐습니다.”
-겸재 화첩은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데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돼 소유권은 여전히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하는 게 한 가지 난관입니다. 기회가 될 때 완전한 반환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은 매주 강론 소재를 어디서 찾으시나요?
“사실 강론만 안 하면 신부 할 만하다 할 정도로 소재 찾기가 고역입니다.(웃음) 저한테는 신문이 살아있는 기도서예요.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생기는 상흔, 매일 발생하는 사건 사고 이면에도 초월적 메시지가 숨어있지요. 유년 시절부터 신문 읽기를 좋아해서 광고까지 모든 면을 샅샅이 읽었습니다. 분도출판사 사장 할 때는 5~6개를 구독했고요. 논설위원들의 단문에 매료돼 글쓰기를 배웠지요.”
-새해 새롭게 결심한 게 있습니까.
“올해는 한독 수교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나라 미래 세대의 교류를 위해서 노력하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여름엔 왜관수도원이 운영하는 순심학교의 젊은 선생님들과 함께 오틸리엔 수도원을 포함한 순례를 할 예정입니다.”
-새해가 밝았는데도 우울한 뉴스뿐입니다. 앞이 막막한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눈앞의 매혹적인 우상을 좇지 말고 꾸준히 선한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미래를 변화시킬 힘과 가능성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습니다.”
http://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1/14/WGIPJR4PCZFRDGUPWM5J5YUO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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